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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녀사냥, 여성의 고통은 나의 쾌락

배은기 쌤 2008. 5. 29. 23:17

1420년부터 1670년까지 전 유럽에 걸쳐 이루어진 마녀사냥은 불특정 다수의 힘없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거나 섹시한 여자들은 대부분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돈많은 과부 역시 재산을 수탈할 목적으로 이용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마녀사냥이 이루어진건 아니다. 중세 말에 이르러 군주나 신흥 부유 상인들의 등장해 종교계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에 발 맞춰 신학자들은 마술이나 미신에 의한 치료법등이 모두 악마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에 이익을 탐하던 종교계가 이교도의 색출과 교회권력의 강화를 위해 종교재판소를 만들고 마녀사냥에 들어간다.

 

어처구니없는 마녀 감별법

종교제판관은 우선 여자의 옷을 모두 벗기고 온몸 구석구석 마녀의 징표를 찾아낸다. 이때 마녀의 징표는 종교재판관 마음이라 조그만 한 흉터조차 발견되면 마녀의 징표로 몰려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징표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는 물을 치사량만큼 먹여 죽으면 인간이고 살아나면 마녀라고 판단하거나 몸에 돌을 매달에 물에 빠뜨려 떠오르면 마녀 가라앉으면 사람이라는 식의 황당한 감별법을 쓰기도 했다.

 

그나마 초기의 종교재판은 주동자를 제외하곤 모두 벌금형이나 노동형으로 끝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제판관이 담당하던 마녀사냥을 속세법정에서 담당하게 되면서 엄청난 대학살이 시작된다.

 

북프랑스의 소도시에서는 인구의 절반가량인 2500명이 기소 당하고 그 중 800명가량이 불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1587년 도릴 지방에서는 7년간 387명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 당했고 1590년 에링켄에서는 이후 백년간 250명 가까운 마녀들이 화형 당했다.

 

 

그리고 소소크만텔 승정령에서는 1639년에 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고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1748년에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나노수 지방에서는1629년부터 4년간 2,255명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되었다.

 

바루다세스 후스라는 재판관은 19년간 700명의 마녀를 화형 시켰고 니콜라스 레미라는 마녀 심판관도 15년간 화형시킨 마녀만 900명이었다.

 

독일·영국·프랑스·스위스·핀란드·에스파냐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 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광란을 연출하였던 마녀재판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 정신의 대두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것은 신학에 기반 한 과학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불합리의 극치인 마녀재판도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의 고문과 그에 따른 화형도 사라졌다. 독일의 경우 1749년 뷰루소부르크에서 1건, 1751년 아인팅겐에서 1건, 1775년 겜텐에서 1건의 마녀재판이 기록되었고, 7년 뒤인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라는 지방에서 아인나 겔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죽은 것을 끝으로 마녀재판은 유럽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계의 기득권세력과 신규세력간의 충돌이 만들어낸 마녀사냥은 불특정 소수를 악의 축으로 규정지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불안감에서 탈피하려는 인간의 불안정하고 추악한 단면이 만들어낸 참극이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어디까지 잔인하고 추악해 질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 이상 이념과 종교적 신념 그리고 이익 때문에 피를 흘리는 여성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 : 마녀사냥, 여성의 고통은 나의 쾌락
글쓴이 : 야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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